세계 최대 간편결제사업자인 페이팔이 암호화폐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2020년 연말까지 페이팔 지갑에 암호화폐 사고 팔기 기능을 추가하고, 내년 초에는 모든 온라인 가맹점에서 암호화폐를 이용한 결제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2020년 10월 21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서 밝혔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암호화폐에 대한 이용자들의 이해와 채택을 높이기 위해" 암호화폐 사고팔기 기능을 먼저 출시할 예정이다. 미국 내 페이팔 계정 소유자는 몇 주 안에 이런 기능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사고팔기가 지원되는 암호화폐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비트코인캐시, 라이트코인 등이다.

이 같은 기능을 내년 상반기 중 간편송금서비스 벤모(Venmo)로 확장하고, 해외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란다. 암호화폐를 적극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사실상 페이팔 지갑은 암호화폐 거래소 기능을 포함하게 됐다. 이에 페이팔은 미국 내 암호화폐 거래소 규제 준수를 위해 뉴욕주로 부터 조건부 '비트라이센스'도 획득했다고 한다.

아직 많은 대중이 사용하지 않은 암호화폐지만, 사실상 화폐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점점 주류 문화로 진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좋지 않은 선입견으로 거리낌이 존재하지만 마냥 무시하거나 관심의 영역에서 방치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3억5천만명 쓰는 페이팔, 비트코인 품었다

3억5천만 명이 사용하는 세계 최대 간편결제사업자 페이팔이 암호화폐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연말까지 페이팔 지갑에 암호화폐 사고 팔기 기능을 추가하고, 내년 초에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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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나처럼 괜찮은 사람은 많지 않을거야. “ -프롤로그, 14p-

 

불편했다. 적나라하게 나를 비춰내어서...

“ 그래. 나 정도면 괜찮지 않냐? “ 얼마나 많은 자기기만이, 진득한 이기심이 이 글을 읽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어디서부터 흘러왔을까? 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의 원죄에서 왔을까? 

거대한 인류의 역사 안에 얼마나 지독하게 배어있을까?

세상에 갑은 흐른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갑이었고 또 누군가에게 을이 되어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왕이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 줄 왜 모르겠나. 알면서 간신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편하기 때문이지. 왕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굳이 속마음을 입술로 옮기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지. 입안에 있는 혀처럼, 풀숲을 조용히 미끄러지는 뱀처럼. -사람은 어떻게 흑화하는가, 27p-

 

나는 흑화할 용기도, 순수를 지킬 용기도 없는 겁쟁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겁하니 나도 비겁해도 괜찮은걸까? 아니 아니다. 아주 아니다.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흑화하던지 순수를 지키던지.

몰랐다. 지금껏 몰랐다는 게 신기하게도 진심으로 몰랐다. 그래, 살아지는 대로 살았나보다. 흑화하는 것이 비겁한 것이 아니다. 마흔의 나는 세상과의 타협이 비겁하다고 할 만큼 순진하지 않다. 하지만 선택은 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지 않겠나.

 

 

" 케익이 몇 조각 남았니? 세 조각 남았지. 니네가 앞으로 살면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넷 중 하나라도 케익을 포기하게 만들어선 안되는 거야. 차라리 셋 다 안 먹고 말아야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시시한 인생, 인간마저 시시해지면, 53p-

 

나 인생 정말 시시하게 살았거든. 이제부터라도 시시하지 않게 살아야겠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어떻게든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어거지로 덮어쓴 껍데기 벗고, 못하는 거 못한다고 말하고 케익 한 조각 주면 나눠 먹으면서 살면 되지. 겁내지 말자! 그래 인생 시시하게 살지 말아야겠다.

 

 

그렇습니다. 모든 건 당신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의미있는 삶이 되려면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기억을 갖기 위해 세상과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정확하게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67p-

 

남이 주는 거 받아먹으며 살지 말자. 이날까지 두려워하며 살았으면 됐지 않나. 지금까지 겁쟁이로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나. 눈을 뜨고 정면으로 마주 서보자. 그래 마흔이면 혼자 설 때도 됐지 않겠나. 

 

 

" <뽀빠이>에 나온 불후의 명언이 있죠. '나는 나인 것이다.(I am what I am)'" -지더라도 개기면 달라지는 것들, 70p-

 

안다. 알고 있다. 살아보니 흑화하며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내 목소리 내며 당당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지 잘 알고 있다. 시시하게 살지 않겠다고? 웃기는 소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하지만! 살아보고 싶다. 한번 뿐이래매! 인생! 나로, 한사람으로! 숟가락에 지지말고, 비굴하게 무릎 꿇지 않고 서 보고 싶다. 영화<베테랑>에 나온 대사처럼 "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라며 살아 보고 싶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센서 등을 깜빡일 때, 전체-

 

나도 그랬다. 아버지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강남은 아니더라도 판교에 땅이라도, 아니면 아파트라도 하나 사두지. 이런 생각 나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망나니같은 둘째에게 뭐 그리 미안하신지 자꾸 미안하다고 하셨다. 언젠가 가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고기를 사주시면서 그러셨다. 미안하다고, 아버지가 고시공부해서 미안하다고, 그냥 의대 갔으면 지금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텐데.. 미안하다고..

 

아버지 청년 때 거리로 나서야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고 싶던 의대가 아닌 법대를 가셨단다. 목소리를 내고 싶으셨다고.. 세상의 부조리에서 한 숟가락이라도 덜고 싶으셨다고.. 근데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더란다. 고시에 실패하고 그도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게 되면서 실패자가 되어가더란다.

 

아버지는 참 열심히 사셨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열심히 일 하셨다. 주말이면 언제나 청소를 하시고, 우리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셨다. 항상 책을 보며 공부를 하셨던 아버지는 어린 내게 큰사람이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더 비굴해졌던 것은 나였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다만 당신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비굴하셨던 것이다. 나도 그렇다.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센서등이든 촛불이든 뭐든 간에 깜빡여 보고 싶다. 아빠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우리는 선에게서 배워야 한다. 침묵하면 그다음은 내 차례란 것을. 내가 침묵하면 나 자신도 꼼짝없이 금 밟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당신과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왕따당하고 마녀사냥당하는 이를 위해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변호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할 자신이 있는가. -악이 승리하기 위한 필요조건, 177p-

 

알겠지만 왕따 편을 들면 같이 왕따가 된다. 사회적인 동물인지라 그룹에서,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두렵더라. 그래서 나도 '보라의 일당'이었다. 그럼 이제는 금 안밟았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훈련이 필요하다. 체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 평생 단 한번이라도 냄새 같은 건 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일어서는 훈련부터 하는 것.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인 것 같다.

 

 

살던 대로 살기 싫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살던 대로 살기 싫어지는 순간, 185p-

 

그게 지금 나다.

 

 

" 도망치는 사람한테 비상구는 없어. 나 다신 도망 안 가. 그러니까 니들 다 진짜 까불지 마라. " -하찮아지느니 불편해지려고 한다, 199p-

 

<동백꽃 필 무렾>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적당히 눈치를 봐야 매끄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상사가 퇴근을 하지 않으면 기다린다거나, 회사의 세무신고를 적당히(?) 하는 것 등등 매끄러워야 편하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거짓말을 하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 거짓을 말 한 사람이라더라. 자신의 자존감, 자신의 마음에, 양심에 그 만큼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당당하려고 한다. 나 뿐 아니라 다음사람을 위해서라도 해야할 말은, 해야 할 일을 당당하게 하려 한다. 비록 불편해지더라도 하찮아져야 쓰겠는가. 그리고 죽이기야 하겠나. 그래서 나도 만들었다. 나만의 원칙. 그러니 니들 다 진짜 까불지 마라. 이제 나도 원칙이 있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그런데 감당하지 못할 글이 더 많다. 아직 여물지 않은 내가 읽기에 퍽퍽한 마음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은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책을 권해주신 분께 참 감사한다. 인생을 바꿔준 책이 있냐고 누가 물어보면 할 말이 생겼다. 프롤로그에 쓰인 글처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더라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도 별수 없구나'란 마음과 함께 여기까지 와있는 내게 참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멋도 모르면서 참 애썼구나 싶어서 짠하기도 했다. 변한다고 했지만 똑같이 살아갈지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껍질을 나온 이상 자라던지 고사하던지 모두 내 것이다. 이제 나는 인생을 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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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신에 대한 부정,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동정, 일그러진 정의에 대한 자조

 

어린 시절, 세상이 아름다웠던 시간,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과 따스한 빗방울, 친구들의 밝은 웃음소리,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빛나는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옛날 얘기 속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던 맑은 하늘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던 빗방울.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괴기스러운 어둠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줄 알았던 나에게 책 서두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아름다움은 행복함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아름다운 기억의 회상들은 마흔이 돼가는 남자의 마음을 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래서 더 아픈.. 우리네 인생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빅토르와 ‘그’는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빅토르가 경험한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어린 시절을 ‘그’도 겪는다. 다만 다른 점은 철저하게 유린된 상처 속에서 사랑을 갈망하게 된다는 점이겠지만..

 

처음 들어온 마음은 추악한 차별이다. 어떻게 ‘그’의 선한 마음과 착한 양심을, 아름다운 정서를, 외모의 다름을 가지고 철저하게 외면해버릴까. 짓밟고 부숴버릴 수 있을까. 어쩜 이렇게 잔인할까. 이유는 흉측해 보이기 때문. 사람의 정의란 너무나 상대적인 듯하다.  유스틴의 유죄 판결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오두막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그러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일그러진 채 우리 옆에 있는 정의를 보게 된다. 어떻게 한 소녀의 인생과 고귀한 인간성을, 천국을 바라는 가엾은 마음을 허망하게 짓밟아 버릴까. 흉악한 야생에서 매일을 장작을 패서 채워 넣은 그 선한 마음을 그렇게 가차 없이 외면해버릴까. 맹인 노인과의 일상적인 대화마저 감격하는 그를 누가 괴물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나 아닐 것이다. 아닐테지.. 이렇게 가엾은 ‘그’를 만나면 모르긴 몰라도 가장 상처 주고 마음을 찢어버릴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서슴없이 비수를 꽂아 넣을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이 소설이 나를 보게 하여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왜 빅토르는 ‘그’가 혐오스러웠을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왜 신은 인간을 혐오하는 가로 옮겨간다. 신이 인간을 혐오한다? 이제 막 태어난 ‘그’를 조물주인 빅토르는 혐오한다. 그렇게 열정을 다해 만든 존재를 저주하고 맹렬히 증오한다. 왜..? ‘그’의 죄라면 태어난 것뿐인데.. 그런데 인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막 태어난 아이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부모도, 나라도, 인종도 그 무엇도! 태어난 아이는 선택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그런데 우리는 성별의 다름으로, 인종의 다름으로, 종교의 다름으로, 아무튼 무엇인가의 다름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혐오한다. 증오한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4명의 자녀중 3명을 잃었다. 그 아이들의 죽음에대한 엄마의 좌절, 그것이 태초에 인간을 세상에 내던진 신에 대한 혐오이지 않을까.

 

신은 삼위일체라고 하던가. 셋이나 하나인 존재,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였을까.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은 당시의 괴물이었던 ‘그’는 혹시 신들의 교감을, 사랑을, 그러한 소통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가 오두막 속 세 명의 보호자들을 갈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우연히 빅토르의 가방을 주워 ‘실낙원’을 읽게 된다. 천국을 잃은 아담의 이야기를.. 그 책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피조물의 절규를, 세상에 대한 저주를, 조물주에 대한 복수를 읽었을까? ‘그’는 닮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주고 그곳에서 추방된 피조물의 좌절과 절망을 완벽한 피조물이었던 아담과 흉측하고 기괴한 자신을 마치 닮은 꼴처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절규를 들은 조물주(빅토르)는 ‘그’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래서 교감을 나눌 흉측한 어떤 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본 그들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없겠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겠다. ‘그’의 좌절과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타협을 본 조물주는 ‘그녀’를 만들기 위해서 고뇌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신에 대한 격한 감정이라고 읽히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동정. 신에게 버림받고 같은 사람에게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에 대한 동정이다. 저자가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희망없이 내던져지는 ‘그’에게서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추가)

 

프랑켄슈타인에 이름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작명이 없었던 여류 작가들의 차별에 대한 절규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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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교 교사분이 쓰신 글을 읽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코로나19로 인해서 학생들과의 교감을 잃었다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밥을 먹고, 등굣길에 친구와 인사하고, 팀 나눠 피구 경기를 하는 일상을 잃었단다. 우리 아이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 이상 스마트 기기 앞에서 온라인으로 진도를 맞추고 있지만, 교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예기한다. 

 

“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려면 촉박한 시험보다는 대화하며 교감하는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

 

사람 노릇은 교감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읽혀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다. 

 

“ 우리 반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전원이 집보다 학교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

 

놀랄 노자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냐면 월말고사에서 수학점수가 12점 나온 적도 있다. (감추고 싶지만 뭐 이제와서 어떤가.. 12점 맞은 아이도 자라서 이렇게 직장생활하며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당시 배점이 4점이었으니 3문제 맞은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소위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담배피우고 몰려다니면서 싸움이나 했던 깡패같은 학생(?)이었다. (어쩌면 학생같은 깡패였을지도 모른다.) 재밌는 건 내가 입버릇처럼 학교가 싫다는 애길 했다는 것이다. 머리도 못 기르게 하고, 담배도 못피우게 하는, 규율과 규제라는 틀 안에 있는 그 곳을 나는 너무나 싫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학교는 올바른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기사를 읽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가출을 해서도 학교는 갔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학교 식당 한켠에 있는 방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아침드라마를 보며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그나마 덜 노는(?) 아이들과 땡땡이를 치러 당구장에 갔다. (이것도 땡땡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선생님 입장에서 나는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대단한 것은 땡땡이를 치고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기사를 읽으면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왜 다시 학교에 들어왔을까?  심지어 야자시간에 내자리에 앉아 있다 밤10시에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멋지지 않은가?

 

만약 교보재가 나밖에 없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친구들과 노는 것이라고, 학교는 친구들이 있는 공간이고 그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학창시절 많은 것을 배웠다. 확실한 건 교과서는 아니었겠지만 나도 배웠다. 지금 내 삶에서 나타나는 많은 것들이 그 때 배운 것들이다. (다행인건 지금은 쌈박질이나 땡땡이를 치면서 살진 않는다)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는 관계하는 것을 배웠고 좋아했다. 머리도 못 기르고 담배도 못 피우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들을 피해다니며 사고를 치는 것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제 알았지만 나는 학교를 너무나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사람이 자랄 때 지식 뿐 아니라 교감과 사랑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 시간이 정말 우리가 얘기하듯 그렇게 중요한 시기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모든 학생은 집보다 학교가 재미있다 - 시사IN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진즉에 강릉으로 갔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해시나 삼척시에서는 제대로 된 대입 준비를 할 수 없다고 그랬다. 그나마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강릉

www.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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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7일

 

브라질의 7살짜리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주차되어 있던 차를 긁었단다.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오늘의 뉴스중 가장 시선을 끄는 뉴스였다. 아이는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 쿠리치바에 사는 베니치오 호프만(7).

 

베네치오는 자동차의 흠집을 확인한 뒤 도망가지 않고 사고를 수습한다. 그는 종이에 차주가 볼 수 있도록 메모를 남겼다. 서툰 글씨로 또박또박 쓰여진 메모엔 “ 죄송해요. 자전거를 타다 쓰러져 자동차에 흡집을 냈어요. 여기 우리 아빠의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메모를 확인한 차주는 감동하여 자신의 트위터에 해당 메모를 올렸다. 그의 트위터 팔로워는 400명 정도였지만 해당 게시물은 42만여명 이상이 리트윗하며 폭팔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심지어 현지 언론에까지 소개되며 한국의 일간지에도 기사가 실리는 기염을 토했다.

 

어째서 이런 기사가 감동이 될까. 왜 이런 이야기가 일간지에 실렸을까 생각해봤다. 나도 운전을 한다. 가끔 차에서 내릴 때 옆 차문을 긁는 이른바 문콕을 시전할 때도 있다. 심지어 운전이 미숙할 때 주차중 실수로 다른 차에 흠집을 냈던 적도 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주차라인이 너무 좁은거야 “, “ 다른 사람들도 이정도 실수는 하잖아, 괜찮아 “ 물론 메모를 남기거나 차주에게 연락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있다.

 

7살 베네치오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도망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세상이 이미 너무 나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나쁜짓을 하면 안 되요 “

 

초라한 비겁함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081320

 

new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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