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신에 대한 부정,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동정, 일그러진 정의에 대한 자조
어린 시절, 세상이 아름다웠던 시간,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과 따스한 빗방울, 친구들의 밝은 웃음소리,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빛나는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옛날 얘기 속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던 맑은 하늘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던 빗방울.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괴기스러운 어둠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줄 알았던 나에게 책 서두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아름다움은 행복함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아름다운 기억의 회상들은 마흔이 돼가는 남자의 마음을 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래서 더 아픈.. 우리네 인생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빅토르와 ‘그’는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빅토르가 경험한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어린 시절을 ‘그’도 겪는다. 다만 다른 점은 철저하게 유린된 상처 속에서 사랑을 갈망하게 된다는 점이겠지만..
처음 들어온 마음은 추악한 차별이다. 어떻게 ‘그’의 선한 마음과 착한 양심을, 아름다운 정서를, 외모의 다름을 가지고 철저하게 외면해버릴까. 짓밟고 부숴버릴 수 있을까. 어쩜 이렇게 잔인할까. 이유는 흉측해 보이기 때문. 사람의 정의란 너무나 상대적인 듯하다. 유스틴의 유죄 판결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오두막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그러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일그러진 채 우리 옆에 있는 정의를 보게 된다. 어떻게 한 소녀의 인생과 고귀한 인간성을, 천국을 바라는 가엾은 마음을 허망하게 짓밟아 버릴까. 흉악한 야생에서 매일을 장작을 패서 채워 넣은 그 선한 마음을 그렇게 가차 없이 외면해버릴까. 맹인 노인과의 일상적인 대화마저 감격하는 그를 누가 괴물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나 아닐 것이다. 아닐테지.. 이렇게 가엾은 ‘그’를 만나면 모르긴 몰라도 가장 상처 주고 마음을 찢어버릴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서슴없이 비수를 꽂아 넣을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이 소설이 나를 보게 하여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왜 빅토르는 ‘그’가 혐오스러웠을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왜 신은 인간을 혐오하는 가로 옮겨간다. 신이 인간을 혐오한다? 이제 막 태어난 ‘그’를 조물주인 빅토르는 혐오한다. 그렇게 열정을 다해 만든 존재를 저주하고 맹렬히 증오한다. 왜..? ‘그’의 죄라면 태어난 것뿐인데.. 그런데 인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막 태어난 아이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부모도, 나라도, 인종도 그 무엇도! 태어난 아이는 선택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그런데 우리는 성별의 다름으로, 인종의 다름으로, 종교의 다름으로, 아무튼 무엇인가의 다름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혐오한다. 증오한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4명의 자녀중 3명을 잃었다. 그 아이들의 죽음에대한 엄마의 좌절, 그것이 태초에 인간을 세상에 내던진 신에 대한 혐오이지 않을까.
신은 삼위일체라고 하던가. 셋이나 하나인 존재,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였을까.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은 당시의 괴물이었던 ‘그’는 혹시 신들의 교감을, 사랑을, 그러한 소통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가 오두막 속 세 명의 보호자들을 갈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우연히 빅토르의 가방을 주워 ‘실낙원’을 읽게 된다. 천국을 잃은 아담의 이야기를.. 그 책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피조물의 절규를, 세상에 대한 저주를, 조물주에 대한 복수를 읽었을까? ‘그’는 닮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주고 그곳에서 추방된 피조물의 좌절과 절망을 완벽한 피조물이었던 아담과 흉측하고 기괴한 자신을 마치 닮은 꼴처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절규를 들은 조물주(빅토르)는 ‘그’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래서 교감을 나눌 흉측한 어떤 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본 그들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없겠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겠다. ‘그’의 좌절과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타협을 본 조물주는 ‘그녀’를 만들기 위해서 고뇌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신에 대한 격한 감정이라고 읽히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동정. 신에게 버림받고 같은 사람에게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에 대한 동정이다. 저자가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희망없이 내던져지는 ‘그’에게서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추가)
프랑켄슈타인에 ‘그’는 이름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작명이 없었던 여류 작가들의 차별에 대한 절규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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