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 교사분이 쓰신 글을 읽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코로나19로 인해서 학생들과의 교감을 잃었다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밥을 먹고, 등굣길에 친구와 인사하고, 팀 나눠 피구 경기를 하는 일상을 잃었단다. 우리 아이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 이상 스마트 기기 앞에서 온라인으로 진도를 맞추고 있지만, 교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예기한다. 

 

“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려면 촉박한 시험보다는 대화하며 교감하는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

 

사람 노릇은 교감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읽혀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다. 

 

“ 우리 반 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전원이 집보다 학교가 더 재미있다고 했다. “

 

놀랄 노자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냐면 월말고사에서 수학점수가 12점 나온 적도 있다. (감추고 싶지만 뭐 이제와서 어떤가.. 12점 맞은 아이도 자라서 이렇게 직장생활하며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당시 배점이 4점이었으니 3문제 맞은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소위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담배피우고 몰려다니면서 싸움이나 했던 깡패같은 학생(?)이었다. (어쩌면 학생같은 깡패였을지도 모른다.) 재밌는 건 내가 입버릇처럼 학교가 싫다는 애길 했다는 것이다. 머리도 못 기르게 하고, 담배도 못피우게 하는, 규율과 규제라는 틀 안에 있는 그 곳을 나는 너무나 싫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학교는 올바른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기사를 읽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가출을 해서도 학교는 갔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학교 식당 한켠에 있는 방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아침드라마를 보며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그나마 덜 노는(?) 아이들과 땡땡이를 치러 당구장에 갔다. (이것도 땡땡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선생님 입장에서 나는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대단한 것은 땡땡이를 치고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기사를 읽으면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왜 다시 학교에 들어왔을까?  심지어 야자시간에 내자리에 앉아 있다 밤10시에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멋지지 않은가?

 

만약 교보재가 나밖에 없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친구들과 노는 것이라고, 학교는 친구들이 있는 공간이고 그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학창시절 많은 것을 배웠다. 확실한 건 교과서는 아니었겠지만 나도 배웠다. 지금 내 삶에서 나타나는 많은 것들이 그 때 배운 것들이다. (다행인건 지금은 쌈박질이나 땡땡이를 치면서 살진 않는다)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는 관계하는 것을 배웠고 좋아했다. 머리도 못 기르고 담배도 못 피우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들을 피해다니며 사고를 치는 것도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제 알았지만 나는 학교를 너무나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사람이 자랄 때 지식 뿐 아니라 교감과 사랑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 시간이 정말 우리가 얘기하듯 그렇게 중요한 시기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모든 학생은 집보다 학교가 재미있다 - 시사IN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진즉에 강릉으로 갔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해시나 삼척시에서는 제대로 된 대입 준비를 할 수 없다고 그랬다. 그나마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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